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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31. 02:46 사는 이야기

 내가 외국 소설 번역본을 구입하기 전에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은 번역자의 프로필과 그 책의 중역 여부다. 우리나라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둔 파울로 쿠엘류의 소설은 지금 새로운 번역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포르투갈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어를 전공한 사람이 프랑스어 번역본을 갖고 번역한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 책의 목차나 커버를 보면 확인해볼 수 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이 되면서 원래의 뜻이 어느정도는 왜곡될 수 있으며, 프랑스어에서 한국어로 번역이 되면서 다시 한 번 뜻의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원서를 그대로 읽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하는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깨우칠 수는 없으니 번역서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작년 이맘 즈음에 어떤 출판사에서 매우 자극적인 광고문구와 더불어 꽤 유명한 소설의 오역을 지적하는 새로운 번역서가 출판되었다. 오래전에 꽤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라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바쁜 일상속에서 잊고 살다가 며칠전 누군가와 대화중 우연히 그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관심을 갖고 그와 관련된 논란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런 책은 읽어볼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잘 못하는 사람이 미천한 실력을 만회하고자 영역본을 대조하여 일반인들이 읽기 쉬운 문체로 뜯어고친 문장으로 가득한 것은 번역이 아니라 날조라 할만 하다. 프랑스어를 못하니까 기존의 번역이 이상하게 보인 것이라고 밖에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번역자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온라인에서 거론된 이유는 이자가 또 다른 프랑스 소설을 번역하겠다고 하면서부터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주제는 못되었기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탄식과 더불어 공유된 것인데, 또 어떤 엉터리 지적질과 더불어 책팔이를 하려할지 궁금해질 뿐이다. 애초에 번역이라는 것은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사람들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인데, 어디선가 나타난 선무당이 군중심리를 이용하게 굿판 한 번 크게 벌이려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이런 책이 어찌 그리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기업에서도 외면하고, 십여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유학을 다녀온들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워 시간강사로 전전하는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영역이다. 그 중 정규직 교수가 되는 것은 실력과 더불어 외부적인 요인도 매우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이런 바다에 섣불리 뛰어들 용자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불안정한 미래를 위해 기나긴 시간과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 때문인지 몰라도 이 분야에도 고령화 현상과 더불어 세대교체 같은 일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저런 자극적인 광고 문구가 처음엔 신선하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류의 얄팍한 상술을 덮어쓴 엉터리 번역서가 범람하도록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출간과 더불어 제기된 논란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논란의 내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각종 책 판매 사이트에 남겨진 칭찬일색의 리뷰들이라 하겠다. 이것은 이른바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깨는 행위가 아니라, 그렇게 포장된 일종의 반달리즘이 아닐까?

posted by Bogdanovic